지도 제작의 어제와 오늘 (2) "지도제작 수단을 이용한 전쟁과 토지 획득"

문광주 기자 / 기사승인 : 2024-07-01 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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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와 마젤란 시대에는 지도 제작이 주로 토지 발견과“지도로 정복하는 데 사용
- 대부분 유럽 국가는 17세기와 18세기에 지도를 만들었다
- 1885년에 식민 세력은 지도의 선을 사용해 아프리카를 단순히 분할
- 프랑스 지도 제작자들, 국경선을 약간 이동해 서류상으로 사원이 캄보디아에 귀속시켜
- 프레아 비헤아르 신전 분쟁: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판정

토지 측량 및 국경 설정
지도제작 수단을 이용한 전쟁과 토지 획득


콜럼버스와 마젤란 시대에는 지도 제작이 주로 토지를 발견하고 “지도로 정복”하는 데 사용됐지만 대부분 유럽 국가는 17세기와 18세기에 지도를 만들었다. 지도와 지리정보는 여전히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경보 시스템 ‘삐걱거리는 계단’

프로이센의 “군인왕(Soldier King)”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조차도 나라를 지도로 조사하면 전쟁에서 유리할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는 프로이센 중장에게 "모든 장소에 대한 정확하고 완벽한 개요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준비"하고 지도실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측량과 지도 제작은 프로이센의 군사와 민간 행정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내부 및 재정 행정을 위한 중앙 권한을 창설했으며 개혁의 일환으로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사진은 총무부에 대한 1722년 왕의 지시다. © historisch

그러나 프로이센에서도 지도는 소수의 선택된 그룹에게만 제공됐다. 군인왕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지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여행할 때 항상 가장 중요한 지도 사본을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는 포츠담 시티 팰리스(Potsdam City Palace)의 기획실을 자신의 아파트 위층으로 옮겼다. 입구는 삐걱거리는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왕이 지도 수집을 직접 모니터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지도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면 군사 적들이 국가를 침공하기 더 쉽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18세기 말에 제작된 더 정확한 대축척 지도는 전혀 인쇄되지 않거나 축소된 축척으로만 인쇄가 허용됐다.

정보의 원천 ‘전쟁 포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대였던 오스트리아의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좋은 지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7년 전쟁(1756~1762) 동안 지도가 부족하여 안타까운 경험을 한 후 그녀는 프로이센 모델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국가 조사에 착수했다.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도 지도 제작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 historisch

상대방을 염탐하고 지도 제작의 세부 사항을 염탐하는 데 있어서 두 세력은 결코 서로 뒤처지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자신의 장교들을 오스트리아군의 프로이센 포로들과 즉시 교환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포로로 잡힌 오스트리아군이 적 영토에 장기간 체류한 후 프로이센의 요새와 지형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그들의 전술을 알아채고 장교들을 일찍 집으로 돌려보냈다.

반면 프로이센은 비엔나 요새 확장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프로이센 참모부의 지도 사무실에는 비엔나 요새 재건을 기록한 놀라운 지도 모음집이 있었다. 새로운 요새를 포함한 비엔나의 도시 지도가 1770년대 초에 인쇄될 예정이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지도 원고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했으며 프로이센의 반대자들도 생각했다. 그녀는 요새가 종이에 더 크고 난공불락으로 보이도록 다양한 변경을 했다.

미친 경계선

그 당시에도 지도는 국가의 영토를 표시하고 주장하는 데 사용됐다. 당시에는 지도에 국경이 표시되면 공식화됐다. 이런 식으로 국가들은 “붓놀림”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1885년에 식민 세력은 지도의 선을 사용해 아프리카를 단순히 분할했다.

이러한 경계 표시를 사용하면 약간의 속임수를 쓰고 싶은 유혹이 들기 마련이다. 약간의 행운이 따른다면,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즉시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1958년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된 프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사 과정에서 태국은 합의된 국경선이 이동되어 캄보디아가 문제의 사원을 자국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 태국과 캄보디아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위)을 둘러싼 국경 분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기도 했다.© UNSESCO /CC-by-sa 3.0 IGO; Nationaal Archief/ gemeinfrei

프레아 비헤아르 신전 분쟁

최초의 국경 조약은 1907년 당시 시암(Siam)과 캄보디아의 식민지 주인이었던 프랑스 사이에 체결되었다. 따라서 자연 유역이 경계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계약상의 합의와는 달리 프랑스 지도 제작자들은 지도에서 국경선을 약간 이동하여 서류상으로는 사원이 캄보디아에 속하도록 했다. 이 지도는 실제로 다르게 명시된 계약서와 함께 당시에 전달되었다.

샴-태국 당국은 처음에는 이 작은 “수정 사항”을 간과하고 이 지도를 재인쇄하여 배포했다. 그러나 나중에 분쟁이 발생하여 1958년 태국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되기도 했다. 1962년에는 태국이 처음부터 변경된 지도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캄보디아를 선호하기로 결정했다.

판결에 따르면 국가는 지도상의 국경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판결은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캄보디아가 2007년 유네스코에 이 사원의 세계유산 지위를 신청한 이후 국경을 둘러싼 분쟁이 다시 불붙었고, 2008년에는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2013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사건을 다시 다루었지만, 이번에도 캄보디아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계속)

[더사이언스플러스=문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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