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가가 악당이 된 사연 (2) "미즐리, 유연 휘발유 발명"

문광주 기자 / 기사승인 : 2025-06-01 22:39:38
  • -
  • +
  • 인쇄
5분 읽기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된 몇 년 동안 미즐리는 약 3만3천 가지의 다양한 화합물을 시험
- 1921년 12월 9일, 마침내 후보 찾아. 탄소, 수소, 납으로 구성된 화합물인 테트라에틸납
- 1922년 초, 미국 보건복지부는 자동차 연료에 납을 첨가할 경우 건강상의 위험을 경고
- 연료 첨가제인 테트라에틸납을 제조시설에서 5명의 근로자가 사망하고 35명 납 중독
- 1970년대 초 독일에서 금지, 미국은 1996년에 금지

"노킹을 끝내자"
미즐리, 유연 휘발유 발명


이 "납 유산"의 배후에는 미국의 기계공학자 토마스 미즐리 주니어가 있었다. 그는 1889년 발명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미즐리 시니어는 이미 자동차 타이어의 초기 개발에 상당한 공헌을 했고, 할아버지 제임스 에머슨은 톱과 관련된 여러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미즐리 주니어는 어린 시절부터 창의적인 정신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야구공에 느릅나무 껍질을 씹어 코팅하여 궤적을 곡선화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 "보스" 찰스 케터링이 자신이 발명한 전기 시동기와 함께. © historical

금전 등록기에서 자동차 혁신으로

훗날 미즐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문 코넬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11년, 그는 최초의 금전 등록기를 제조한 회사인 내셔널 캐시 레지스터 컴퍼니에 입사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이 직장에서 미즐리는 몇 년 전 최초의 전기 시동 모터를 발명한 엔지니어 찰스 케터링에 대해 듣게 됐다.

이것은 미즐리에게 결정적인 진로 변화로 이어졌다. 1909년, 케터링은 데이튼 엔지니어링 연구소(Dayton Engineering Laboratories Company) 또는 줄여서 "델코(Delco)"라는 독립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주로 자동차 산업의 기술 혁신에 중점을 두었다. 델코는 무엇보다도 전기 시동 모터를 발명했다. 1918년, 이 회사는 자동차 대기업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에 매각되었다.

"사장님, 제가 다음에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미즐리는 케터링의 연구소에 지원했고 즉시 채용되었다. "사장님, 제가 다음에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미즐리는 작은 프로젝트를 완료한 후 "사장"인 찰스 케터링에게 물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에서 보낸 과제는 미즐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노킹을 끝내도록 하세요." 이 과제의 배경은 당시 아직 초기 단계였던 자동차 기술 분야에서 만연한 문제였다.

1920년대에는 자동차가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었으며 오늘날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운전자가 급가속을 하면 엔진의 연료-공기 혼합물이 자연 발화할 수 있었다. 차가운 불꽃이 생성되었고, 이로 인해 압력 차이가 발생하여 엔진이 고르지 않게 작동하게 되었다. 바로 노킹이었다. 이로 인한 압력 스파이크는 엔진 구성품에 스트레스를 가하고 열을 너무 많이 발생시켜 엔진 손상이 임박할 수 있었다.

붉은 연료가 해결책일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노킹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미즐리는 이것이 연료의 화학적 구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케터링은 자신의 초기 생각을 책에 이렇게 기술했다. "문제를 논의할 때, 연료를 빨간색으로 칠하면 복사열을 더 많이 흡수하고 더 완벽하게 증발하여 불완전 연소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실에는 빨간색 염료가 없었기 때문에 미즐리는 요오드를 사용하여 연료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실험 결과 요오드를 첨가하면 실제로 노킹이 방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동시에 요오드 첨가제는 엔진 부품의 부식을 유발했다. 또한 연료 가격을 갤런당 1달러 이상 인상할 것이었다. 이는 이 가솔린 첨가제가 아직 최적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연구원들은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된 몇 년 동안 미즐리와 그의 팀은 약 3만3천 가지의 다양한 화합물을 시험했다. 1921년 12월 9일, 마침내 적합한 후보를 찾아냈다. 탄소, 수소, 납으로 구성된 화합물인 테트라에틸납이었다. 이 납 화합물을 첨가하자 심각한 부작용 없이 자동차 엔진의 노킹 현상을 방지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 납 흔적 없음: 테트라에틸납을 함유한 연료는 당시 주유소에서 "에틸"이라는 

단어로만 광고되었다. © Plazak/ CC-by-sa 3.0


납 연기를 이용한 홍보 활동

"새로운" 가솔린은 1923년 2월 초, 납에 대한 언급 없이 "에틸"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납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1922년 초, 미국 보건복지부는 자동차 연료에 납을 첨가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건강상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1924년 10월 제너럴 모터스(GM)의 자금 지원을 받은 한 연구는 유연 가솔린 배기가스가 해롭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즐리의 발명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는 같은 달 기자회견에서 테트라에틸납이 얼마나 무해한지 보여주었다. 미즐리는 손에 테트라에틸납을 붓고, 액체가 담긴 병을 코 밑에 대고 1분 동안 증기를 흡입했다. "매일 이렇게 해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발명가는 주장했다. 하지만 대중이 알지 못했던 사실은, 그의 홍보 활동 이전에도 그는 심각한 납 중독 진단을 받았고, 몇 주 동안 회복해야 했다는 것이다.

집 안의 나비들

미즐리만 그의 발명품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연료 첨가제인 테트라에틸납을 제조하는 생산 시설에서 5명의 근로자가 사망하고 35명이 납 중독으로 중병을 앓았다. 그들은 환각 증세를 보이고 나비를 보고 잡으려고 했다. 영향을 받은 두 생산 시설 중 하나는 "나비의 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1924년 10월 31일자 뉴욕 저널에 실린 삽화는 테트라에틸납이 공장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끔찍한 '미친 가스'는 피해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아주 정상적이다가 갑자기 광적인 분노에 휩싸였다." © historical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미국 여러 주에서는 노킹 방지 첨가제가 출시되자마자 금지했다. 1925년에는 여러 유럽 국가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같은 해 건강 위험을 조사하는 위원회는 테트라에틸납이 함유된 휘발유를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금지는 공중 보건에 위협이 된다는 증거가 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결국 1926년에 금지가 해제되었고, 테트라에틸납이 함유된 휘발유의 시대가 열렸다.

시대의 종말

수십 년 동안 유연 휘발유는 여전히 대중의 선택 연료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자동차 배기가스, 특히 휘발유 첨가제에서 나오는 납이 인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따라서 휘발유 내 테트라에틸납의 함량은 점차 제한되었다. 1970년대 초 독일에서, 그리고 몇 년 후 EU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연 휘발유의 발상지인 미국이 연료에 테트라에틸납 첨가제를 완전히 금지한 것은 1996년이 되어서였다. 2000년대 초 EU 또한 유연 휘발유를 금지했다. 2021년에는 유연 연료를 사용하는 마지막 국가인 알제리에서도 미즐리의 발명품이 금지되었다. (계속)

[더사이언스플러스=문광주 기자]

[저작권자ⓒ the SCIENCE plus.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Basic Science

+

AI & Tech

+

Phot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