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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나선, 정크 DNA, 그리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
DNA - 생명의 코드
이중 나선, 정크 DNA, 그리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생명의 "운영 체제"이다. 데옥시리보핵산(줄여서 DNA)에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고 우리 신체의 거의 모든 과정을 제어하는 코드가 들어 있다. 이 중요한 유전 분자의 구조는 1953년 4월 25일 획기적인 기술 기사에서 밝혀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의 DNA와 그 기능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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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1953년 4월 25일에 처음 발표되었다. © Dr_Microbe/ 게티 이미지 |
우리의 게놈은 30억 개의 DNA 문자로 구성돼 있으며 인쇄하면 몇 권의 책을 채울 것이다. 그러나 DNA는 우리 유기체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 편안하게 맞는다. 게놈은 우리의 본성, 외모, 능력을 형성하며 우리 각자를 독특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DNA가 어떻게 생겼는지, 유전자 코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우리 게놈의 95% 이상이 무의미해 보이는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는지 점차적으로 발견했다. 오늘날까지 그들은 몇 가지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다.
DNA 생일 축하! 두 "광대"가 과학에 혁명을 일으킨 방법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약 70년 전에 골판지와 철사로 만든 2미터 이상의 금속 구조물을 묘사했다. 이 구조물은 나선형으로 감긴 밧줄 사다리(이중 나선)와 비슷했다.
1953년 4월 25일, 그는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우리 게놈의 공간 구조인 데옥시리보핵산(DNA)에 대한 모델 제안을 "네이처" 저널에 단 한 그림으로 짧은 페이지에 게재했다. 두 연구원은 두 번째 문장에서 이미 "상당한 생물학적 관심의 새로운 특성"을 지적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델의 미래 중요성을 꽤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화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생화학자 Erwin Chargaff가 불렀던 두 "과학적 광대"가 그러한 발견을 할 수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제임스 왓슨은 15세에 생물학을 공부하기 위해 시카고 대학에 등록했다. 그 당시 그는 주로 새의 세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화학 및 물리학 과정을 성공적으로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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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cis Crick und James Watson
© Marjorie McCarty/ PLoS Biology, CC-by-sa 2.5 us |
따라서 당시 겨우 23세였던 동물학자가 1951년 가을에 영국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왔을 때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지식이 다소 겸손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곳에서 그는 13살 연상의 영국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을 만났다. 연구소장인 로렌스 브래그 경(Sir Lawrence Bragg)은 크릭의 연구 역사를 "프랜시스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말했고 결정적인 가치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요약했다.
1949년에 Erwin Chargaff는 시토신과 구아닌뿐만 아니라 아데닌과 티민 염기가 DNA에 일대일 비율로, 아마도 쌍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기지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배열되어 있고 어떻게 함께 유지되는지 알아낼 시간이었다. 1951년 11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왓슨은 런던 킹스 칼리지의 물리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강의를 들었다. 여기서 그녀는 가장 최근의 DNA X선 회절 이미지를 발표했다.
그는 DNA가 2회, 3회 또는 4회 회전으로 구성된 꼬인 나선형 구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에 흥분했다. 캠브리지로 돌아가서 그는 Crick과 함께 이 구조를 재현하려고 했다. 화학 반응식에 기초해 그들은 분자 팔이 바깥쪽을 가리키는 나선 방식으로 마그네슘 이온에 의해 결합된 세 개의 사슬로 구성된 구조를 의심했다.
실수로부터 배우기
그러나 두 연구원은 틀렸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런던의 생물물리학자 모리스 윌킨스와의 만남은 완전한 불명예가 되었다. 동료들의 슬레이팅은 무자비했다. 프랭클린과 윌킨스가 이전에 만든 X선 회절 패턴은 왓슨과 크릭의 가정과는 달리 지지 사슬이 내부에 있을 수 없으며 마그네슘 이온이 이 구조를 거의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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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NA구조의 모델 © NIH |
Erwin Chargaff는 1952년 7월에 Watson과 Crick을 방문했다. 두 명의 젊은 연구원에 대한 그의 과학적 평가도 충격적이었다. "화학에 대한 거의 완전한 무지와 경멸과 결합된 엄청난 야망과 공격성". 그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대서양 건너의 저명한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도 유전 정보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제안된 모델을 발표했다는 소식으로 과학적 차질이 악화되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1952년 말에 Maurice Wilkins는 Watson과 Crick에게 그의 동료 Franklin이 그녀 모르게 지나가는 X선 구조 분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새로 발견된 DNA의 구조적 형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후 두 연구원은 DNA가 밧줄 사다리처럼 서로 감긴 두 개의 사슬로 구성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각각의 상보적인 염기인 분자 팔은 수소 결합에 의해 함께 고정된다. Watson과 Crick은 이제 이중 나선 구조의 금속 프레임워크를 직소 퍼즐처럼 결합했다. 이 변종은 가장 가혹한 비평가들조차 납득시켰다.
영광과 명예DNA 구조의 "왓슨-크릭 모델"의 발표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자 유전학의 탄생을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Maurice Wilkins와 함께 James Watson과 Francis Crick은 1962년 노벨 의학 및 생리학상을 각각 3분의 1씩 공동 수상했다. 반면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1958년 겨우 37세의 나이로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그녀의 오랜 노력의 영광을 거둘 수 없었다. Franklin과 Wilkins는 오늘날 거의 잊혀졌다. 이중 나선 모델은 Watson 및 Crick 이름과 연결된 상태로 유지된다. (계속)
[더사이언스플러스=문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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